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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악견산 / 2024.7.6. / 산중애의 산행이야기

350대명산 이야기

by 천산만화(千山萬花) 2024. 7. 19.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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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산 합천 악견산
여름날의 암릉산행
오늘의 야생화 바위채송화 일월비비추 개망초
 
<악견산>
이 634m이다. 합천군 대병면 성리에 위치하면 정상부를 이루는 거대한 암벽으로 유명하다. 악견산은 인근에 있는 허굴산(681m)과 금성산(609m)과 함께 삼산(三山)으로 불리며 산세가 험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는 명산이다. 임진왜란 때 쌓은 산성인 합천 악견산성(嶽堅山城:경상남도기념물 제218호)이 있다. 능선은 동쪽의 의룡산(481m)으로 이어지고 서남쪽의 금성산에서 정남향으로 틀어 허굴산으로 이어진다. 서쪽에는 합천댐 합천호가 있다. 등산은 의룡산과 연계하여 오르는 코스가 일반적인데 용문정(들머리버스정류장)에서 황강을 건너 의룡산을 올라 능선을 따라 서쪽 악견산으로 오르는 코스이다. 하산은 서쪽 산성터를 따라 내려가는데 가파른 편이다. 주변에는 합천임란 창의기념관과 합천영상테마파크가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악견산 [岳堅山]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악견산에 서서

 

악견산 개념도

 

임란창의기념관

합천 출신인 정인홍(1536년~1623년)은 남명학파이자 조식의 수제자로 조식이 말년에 자신의 보물인 경의검을 물려준 인물이다. 정인홍은 조선시대 ‘내암집’을 저술한 문신이자 의병장으로 1592년 임진왜란 시기 경상도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성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등의 전공을 올렸다. 광해군 즉위를 적극 지지했고 영의정에 오른 뒤 은퇴하여 고향 합천에 살면서 대북의 막후 실력자 역할을 했다. 의병장 정인홍을 비롯한 수많은 의병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임란창의사’에서 매년 5월 10일 제향행사를 진행한다. [출처:경남도민신문]

 

창의사앞 주차장에서 출발 뒷편이 악견산

 

악견산 안내도

 

개망초가 한창

 

때론 육산의 소나무숲이

 

건너편의 금성산

임진왜란때 왜적들이 장기전을 기하자 금성산 바위에 구멍을 뚫어 악견산과 줄을매어 붉은 옥을 입힌 허수아비를 띄워 달밤에 줄을 당기니, 흡사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 다니는 것 같아 이 것을 본 왜적들은 겁에 질려 도망쳤다는 유래와 전설이 있는 곳이다

 

합천호와 주차장이 보인다

<합천호>

유역 면적은 925㎢이며 만수위때의 수면 면적은 25㎢이다. 1989년 12월 합천군 대병면 상천리와 대병면 창리 사이의 황강 협곡에 높이 96m, 길이 472m의 다목적 댐인 합천댐이 건설됨으로써 등장된 저수지로서 총저수량은 7억 9,000만t이다.

홍수조절 및 생활 및 농·공업 용수와 전력 생산에 이용되는 합천호는 홍수 조절용으로 연간 8,000만t, 생활 및 공업 용수로 연간 5억 2,000만t, 농업 용수로 연간 3,200만t을 공급하고 있다.

또한 황강 및 낙동강 본류의 하천 유지수로 연간 4,700만t을 흘러보내고 있다. 그리고 2012년 7월 저수지 수면을 활용한 수상 태양광 solatus를 준공하여 500Kw 전력을 생산하여 상용화하였다. 짙은 산림으로 드리워진 수많은 깊은 계곡과 함께 수려한 경관을 뽐내고 있고 호반은 국민 관광지로 지정되어 있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인돌인가 자연동굴인가

 

오랜 모자를 벗으려하는 바위

 

바위들이 소나무와 낙옆들에 가려져 있지만 그래도 엄연히 바위산이다

 

바위채송화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산객을 맞아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바위채송화> 산지의 바위 겉에서 자란다. 밑부분이 옆으로 비스듬히 자라면서 가지가 갈라져서 높이 10cm 내외의 기로 된다. 줄기의 밑부분은 갈색이 돌며 꽃이 달리지 않는 가지에는 잎이 빽빽이 난다. 잎은 어긋나고 길이 0.6∼1.5cm, 나비 1.2∼2.5mm로 줄 모양이며 육질이다.
꽃은 8∼9월에 노란색으로 피고 대가 없으며 취산꽃차례에 달린다. 포는 꽃보다 다소 길고, 꽃받침조각과 꽃잎은 5개씩이다. 수술은 10개이고 꽃잎보다 짧으며, 심피는 5개이고 밑부분이 약간 붙는다. 열매는 골돌과로서 5개이다. 한국·일본·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출처 : 바위채송화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악견산성이 있었다고 한다

<악견산성(城)>

합천읍에서 남서쪽으로 15㎞ 지점에 솟은 악견산(491m) 꼭대기의 바위를 연결하여 자연석으로 쌓은 성이다. 《경상도속찬지리지()》에는 1439년에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조사자들은 1592년(선조 25) 무렵으로 추정한다.

기단부는 산에 의지하여 돌을 채우는 산탁() 공법을 쓰고, 윗부분은 양쪽 벽을 모두 돌로 쌓는 협축() 공법을 써서 쌓았는데 윗부분은 일부 무너졌다. 보존이 잘된 곳의 석축은 높이 2.7m 정도 남아 있다. 조선시대의 산성 축조기법이 잘 나타나 있으며, 산꼭대기의 평지에는 건물터가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 성주목사(使)로 있던 곽재우()가 도체찰사(使) 류성룡()의 명령을 받아 보수하고 이용하였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왜군이 장기전을 펴자 곽재우가 인근 금성산() 바위에 구멍을 뚫고 악견산까지 줄을 맨 뒤 붉은 옷을 입힌 허수아비를 달밤에 띄우게 하여, 마치 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왜군을 물리쳤다고 한다. 합천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출처:합천 악견산성 [陜川 嶽堅山城]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세번생각하고 한번 말하라능...

“삼사일언 (三思一言) 삼사일행 (三思一行)”

“한마디 말하기 전에 세 번을 생각하고,

한 번 행동하기 전에 세 번을 생각하라." (공자)

 

 

정상에서 증명사진컷

 

너머에 가물은 합천호가 용처럼 늘어져 있다

 

하류 합천댐 제당부의 모습

 

나름 고래등 바위

 

저곳을 내려왔단 말인가

 

건너편에서 당겨본 멋진 선바위 마치 어렸을적 바석치기 놀이가 생각남

 

무학대사의 출생지

<무학대사> 

법명은 자초(), 당호는 계월헌(), 법호는 무학(). 속세의 성은 박씨()로, 아버지는 숭정대부문하시랑()에 증직된 박인일()이고, 어머니는 고성 채씨()이다.

 

기록에 의하면 무학[1327~1405]의 고향은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기면으로 이곳에 관련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문집류나 여러 가지 관련 설화에는 서산시 인지면 애정리 쑥댕이마을[또는 인지면 모월리] 출신으로 되어 있다. 출생과 관련된 내용을 종합하면 무학의 부모는 합천 지역에 살다가 어떤 사정으로 서산으로 옮겨 무학을 낳은 뒤 합천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서산에는 출생지와 관련된 설화뿐만 아니라 무학이 창건하였고,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어 이름을 지었다는 간월암이 있다.

무학은 18세인 1344년(충혜왕 5) 송광사()의 소지선사에게 출가하였다. 소지선사의 소개로 용문산 혜명국사와 법장국사를 찾아가 부도암()에 머무르며 불법을 배웠고, 이후 진주 길상사(), 묘향산 금강굴() 등에서 수행하였다. 1353년(공민왕 2) 원나라 연도()에서 유학하던 중 인도 승려 지공()을 만나 도를 인정받았고, 법천사()에서 나옹()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귀국한 뒤 성천산 원효암()에 머물던 나옹을 찾아가 법을 전하는 표시인 불자()를 받았으며, 나옹이 신광사()로 옮기자 그곳으로 찾아가 만나기도 하였다.

1371년(공민왕 20) 왕사가 되어 송광사에 머물던 나옹으로부터 선종에서 법을 전하는 표징인 의발()을 받아 사제 관계를 굳건히 하였다. 1376년(우왕 2) 양주 회암사()에 있던 나옹으로부터 초청을 받았으나 거절하였다. 그해 나옹이 입적하자 명산을 돌아다니며 은둔하던 중 공양왕이 왕사로 삼고자 무학을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1384년(우왕 10) 석왕사() 인근 토굴에 머물 때 이성계()를 만났다. 이성계가 꿈 이야기를 하며 풀이를 부탁하니 무학은 장차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1392년(태조 1) 무학은 왕사로 책봉되고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       )’라는 호를 받았다. 정도전() 등의 유학자 출신 관료들이 불교를 탄압하려고 하자 유불일치설()을 주장하는 등 불교 살리기에 힘썼다. 이후에도 태조의 곁에 머물면서 큰일이 있을 때마다 많은 조언을 하였다.

1393년(태조 2) 태조가 왕도()를 옮기려 하자 계룡산, 한양 등 후보지를 돌아다니며 지세를 살핀 후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도록 하였다. 회암사에 지공과 나옹의 사리탑을 세우는 등 불사()를 베풀고 1405년(태종 5) 금강산 금장암()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출처] 무학 [無學]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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